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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여, 행복의 조건을 찾아 떠나라 !! 새터민출신 이경화 (국문09) 동문 -북한에서 한국에 오기까지 그곳에서의 자라온 생활과 한국에 오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을 수 있을까요? : 14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와 둘이 살면서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됐어요. 북한에서는 보통 13-14살이 되면 학교에 가기보다는 부모님이랑 밭에 나가 일을 하거든요. 저도 그렇게 일을 하게 됐죠. 그러다가 어머니도 여러가지 일로 중국에 가시게 되고 저 혼자 고향에 남게 되었죠. 그때가 18살이었는데 북한에서는 혼자 독립하고 취직을 할 나이라 바로 회사에 들어가 일을 했어요. 한국은 원하는 직장에 원서를 내고 취직을 하지만 북한은 공기업으로 되어있다보니 의무적으로 배치를 받아요. 그렇게 비전도 없이 1년 반정도 일을 하다 위험을 무릎쓰고 브로커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 중국으로 가게 됐어요. 중국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남조선 과는 명칭부터가 틀려 처음엔 다른 나라인줄로만 알았죠. 북한에서는 아직도 남조선은 낙후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만 교육받았는데 분단 이후 많은 발전으로 경제강국이 된 한국은 전혀 다른나라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한국에 가기로! 중국은 인권보호가 되지 않아 언제 붙잡혀 갈지도 모르고 평생 숨어서 살아야 하거든요. 여기서 이렇게 숨어서 살 바에야 도중에 잡히더라도 한국으로 가자고 판단했죠. 다행히 한국에 오는 길은 순탄했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이렇게 아주인이 되었죠. - 한국에와서 아주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그건 무엇을 준비했나요? : 처음 한국에 왔을때 제 나이 22살, 제 또래의 한국 젊은이들처럼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꿈도 못꿨어요. 우선 무작정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한국생활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우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탈북자들의 사회정착을 도와주는 하나원에 들어가 공부를 ?諛′杉쨉? 북한과 한국말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서 한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북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학교 5학년 (초등) 으로 입학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1년동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를 한꺼번에 모두합격했어요. 그리고는 대학을 생각했죠. 하지만 전공을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14살때부터 일만 했으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 꿈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러다 생각난 게 국어 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국어 공부가 참 재밌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아주대학교에 원서를 접수하게 됐어요. 원래 탈북 청소년들은 수시를 볼 수가 없는데 아주대학교 특별전형을 통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아주대학교 합격통지서를 받는 순간,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 1학기는 연고도 없이 문화와 시스템의 차이로 지레 겁먹고 두려움속에 다니다가 한학기가 지나면서 점차 적응하게 됐어요. - 대학 생활 외에도 많은 활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에 SBS에서 인터뷰도 했다던데, 어떤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 제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쪽은 다문화 청소년 인데요, 작년까지 보건복지부 산하였다가 올해부터는 여성가족부 산하로 옮겨지면서 이제 탈북자도 다문화권에 속하게 되었어요. 무지개 청소년 기획단이라고 현재 5기인데, 저는 3기부터 시작해 4기때 부회장, 지금은 회장을 맡고 있어요. 통일부와 함께 통일교육의 일환으로 남북문화를 이해시키는 수업을 하면서 남한과 북한 학생 가운데서 다리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얼마 전 SBS에서 인터뷰를 했었어요. 현재 정착하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탈북 청소년들에게 저와 같이 긍정적인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죠. 북한에서 온 친구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제 일상에 대한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 지금 이 순간 행복한지, 스스로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 있다면요? : 저는 지금 이순간이 행복합니다. 어렸을 때 추억은 고향에 많기 때문에 북한을 떠올리면 동심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정착하는 처음 1년은 힘들었지만 이렇게 다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중국으로 떠나 연락이 끊겼던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제겐 모두 기적 같은 일이에요. 가장 행복한 건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유를 얻고 하고 싶은걸 할 수 있다는 거에요. 행복의 조건은 모두 생각의 차이겠지만, 저도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높은곳을 바라보고 꿈꾸겠죠. 모두가 높은 곳만 바라보면서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 하지만 그걸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부터 하나 하나 해나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인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이 저를 행복하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있다면 무엇인가요? : 일단 저는 통일이 될거라 믿어요. 아직까지 교육면에서는 남한이 훨씬 우수하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전공을 살려 북한에 가서 국어교사를 하고 싶어요. 주입식 교육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통일이 된다고 해서 북한에 있는 친구들이 바로 꿈이 생기거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길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저도 처음 자유가 주어지고 제 꿈을 스스로 찾아가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에게도 꿈을 찾아주고 싶어요. 저처럼 이렇게 힘든 과정 속에서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는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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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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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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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스며있는 온정주의적 불평등…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진정한 선진국 책상머리 앞에 붙여 놓은 빛바랜 메모지에 라고 적혀있다. 날짜를 보니 지난 추석 연휴기간에 집에서 DVD로 본 라는 영화 감상후기다. 몇 년 가야 영화관 한 번 갈까 말까한 내가 어쩌다 끝까지 졸지 않고 본 긴 영화 한 편에 사회과학도로서 문제의식이 발동한 모양이다. 영화의 바탕인 마가렛 미첼의 원작 소설은 역사성이나 서사의 거대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개성 등 모든 면에 있어 가히 미국판 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못지않게 내 관심을 끈 장면들은 남북전쟁 전 흑인 노예와 남부귀족 백인 농장주들 간의 관계였다. 물론 노예제의 비참함과 불평등이야 거론해 무엇하랴마는 그래도 양자 간의 관계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지만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그런 흑백논리를 뛰어 넘어 생각보다 친밀하고 인간적이었다. 소설의 배경인 남북전쟁 발발 후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정확히 100년이 지난 1960년에도 미국의 흑백차별이 같은 식당에서 밥을 못 먹고, 같은 버스를 타지 못하는 지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영화의 장면들은 사뭇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1860년과 1960년 미국의 흑백문제를 비교하다가 문득 , <1984> 등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문제의식을 떠올렸다. 그것이 경제, 사회적 지위든 혹은 인종에 따른 피부색이든 개인적으로는 친밀하고 훈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만 함부로 넘기 힘든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을 오웰은 "평등하지 않은 친밀감"(intimacy without equity)이라 하였다. 한 때 제국의 경찰로서 그가 피식민 버마인들에 대하여 느꼈던 감정, 선량하고 지적인 남부 농장주와 흑인 노예의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모순적 관계는 기실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도 쉽게 목도된다. 특히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계층 간 격차가 확대일로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情)의 문화"가 지배적인 우리네 경우 오웰의 문제의식은 사뭇 의미하는 바 크다. 사원은 가족이니 노조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가부장적 노사문화, 식모를 친 딸 같이 키워 시집보낸다며 월급대신 적금을 들라 강요하였던 내 어머니 세대의 정서, 서민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며 같이 서민의 아픔을 공유하는 대통령, 캠퍼스를 청소해 주시는 우리 대학 청소 아주머니에 대한 나의 공손함과 이런 저런 소소한 배려, "아시아 인 러브"에 출연한 동남아 외국인 며느리들에 대한 출연진의 태도, 금메달 따서 병역문제 해결하라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배려의 구타"도 서슴지않는 아시안 게임 볼링 감독 등등. 나는 내 자신을 비롯하여 가끔씩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언급된 이들의 진정성을 구태여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음 편치 못하다. 비록 강도와 횟수가 현저히 약하여 비판적 지성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쉽게 연결되지는 못하여도 말이다. 누군가 당연히 날카로운 질문을 들이댈 것이다. 그렇다면 친밀감 없는 평등함이 나으냐고 말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가난하게 평등하면서도 모든 인민이 동무가 되는 기계적 인간관이 팽배하였던 구 사회주의체제를 누가 선호하겠는가?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유럽에서 장애 노인들이 혐오하는 대상 중의 하나가 관료주의에 찌든 불친절한 복지사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너무 배부른 먼 나라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새겨야할 교훈이 많다. 배 허리 치수가 불어나는 풍요 속에서 온정주의가 "법으로" 혹은 "돈으로"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일의 많은 이치가 그렇듯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해결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의 온정주의 문화와 사회적 진보를 한국적으로 버무려내는 방식을 찾는 것이 연구자인 내가 그나마 "오웰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경인일보- 20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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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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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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